동사서독 [383625] · MS 2011 · 쪽지

2014-02-25 19: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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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흥선대원군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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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조선 25대 왕인 철종이 죽었다. 후사는 없었다. 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다음 보위를 이을 왕은 자연 종친 중에서 찾아야 했다. 전권을 쥐고 있는 이는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익종)의 정비. 왕실에서 그녀보다 높은 사람은 없었다.


헌종조에 이르러 풍양 조씨의 차지였던 권력은 철종조에 이르러 다시금 안동 김씨가 가져간 상태였다. 조대비에게는 안동 김씨의 독주를 견제할 만한 인물, 혹은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집안 사람 가운데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조영하 등이 똑똑하긴 했으나 나이가 어린 게 흠이었다. 어쩔 수 없이 풍양 조씨 외부로 눈을 돌린 조대비의 레이더망에 들어온 건 바로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이하응의 가계는 사도세자로부터 연유된다. 사도세자가 정비인 혜경궁 홍씨에게서 본 아들이 정조이고, 숙빈 임씨에게서 본 세 아들 중 둘째가 은신군이었다. 은신군이 남연군을 양자로 들이고 남연군이 흥선군을 낳으니 흥선군에게 사도세자는 증조할아버지, 영조는 고조할아버지가 되었다. 훗날 흥선군이 정권을 잡고 영, 정조의 정책을 계승한 것은 그의 가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흥선군은 남연군의 막내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식이 높기로 유명했다. 똑똑한 종친은 세도가의 견제를 받는 법. 안동 김씨는 흥선군을 주목했다. 그리고 흥선군 본인도 안동 김씨의 세상에서 안동 김씨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허리를 숙였다. 저자거리에 나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놀았고, 세도가에 동냥질을 하러 다니는 등 기행을 벌였다. 철저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숨겼다.

그 덕에 안동 김씨는 차츰 흥선군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흥선군은 자신의 살 방도를 궁리했다. 그리고 그 역시 조대비를 자신의 파트너로 점찍었다. 난세에서 적의 적은 곧 동지가 아닌가. 게다가 흥선군은 이미 자신의 세 딸 중 둘을 풍양 조씨에게 시집 보내 사돈을 맺은 상태였다. 조대비와 손을 잡을 명분은 충분했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아들 이명복(재황)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바로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이다.

아들이 왕이 되니 아버지의 지위 또한 변했다. 흥선군은 일개 군에서 대원군이 됐다. 왕이 후사없이 죽고 다음대 왕을 종친 중에서 뽑을 때 왕의 아버지를 대원군으로 추존했는데 조선 역사상 대원군에 추존된 인물은 모두 4명. 그 중에서 살아생전 대원군에 오른 인물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아버지의 지위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따. 왕은 조선이란 나라 전체를 놓고 볼 때 만 백성 위에 군림하는 군왕이었지만 왕실(전주 이씨)이라는 한 가문의 입장에서는 그 또한 한낱 아버지의 자식에 불과했다. 현종조에 일어난 예송논쟁 또한 왕의 공적, 사적 지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논란이었다. 그 정도로 조선은 예법, 예학을 중시했다.

현왕의 살아있는 아버지. 게다가 아직 왕은 12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조대비의 수렴청정은 그야말로 형식에 불과할 뿐 실권은 이미 대원군에게 모두 넘긴 상태. 바야흐로 대원군의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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